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송산 전투 (문단 편집) == 《청실록》의 기록 == ○임신일(壬申)에, 다라패륵(多羅貝勒) 다탁(多鐸) 등(等)이 환영(還營)하였다. 또 명(命)하여 내대신(內大臣) 초품공(超品公) 탑섬(塔贍)과 이이등(伊爾登)은 8기(旗)의 호군(護軍) 참령(參領) 각(各) 1원(員)과 매기(每旗)의 정병(精兵) 50명(名)을 인솔(率)하여, 고교(高橋)로 왕(往)하여 설복(設伏)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출영(出營)하자 명(明) 보병(步兵) 천인(千人)을 우(遇)하였는데, 행산(杏山)으로부터 궤둔(潰遁)하니, 아군(我) 전봉(前鋒)의 병(兵)으로 추격(追)하게 하였다. 탑첨(塔瞻)과 이이등(伊爾登) 등(等)이 다시 솔병(率兵)하여 협추(協追/협동하여 추격함)하여 모두 참(斬)하였다. 마침내 고교(高橋)에 이르러 설복(設伏)하였고, 명(明) 기병(騎兵) 8,000명과 보병(步兵) 600명을 조우(遇)하였는데, 행산(杏山)으로부터 도둔(逃遁)하였는데, 탑첨(塔瞻)과 이이등(伊爾登) 등(等)이 진섬(盡殲)하였다. _'''이 역(役)에서 참살(斬殺)한 적중(敵眾)을 계(計)하니 53,783명이고,'''_ 획마(獲馬)는 7,444필이었으며, 낙타(駱駝)는 66필이었고, 갑주(甲冑)는 9,346부(副)하였다. 명병(明兵)이 행산(杏山) 남(南)으로부터 탑산(塔山)에 이르기까지 부해(赴海)한 사자(死者)가 심중(甚眾)하였고, 소기(所棄)한 마필(馬匹)과 갑주(甲冑)는 수(數)로써 만계(萬計)하였다. 해중(海中)의 부시(浮屍/물에 뜬 시체)가 표탕(漂蕩/넓게 떠다님)하였고, 다(多)함이 안목(鴈鶩/기러기와 집오리)과 같았다. 상(上)의 신모(神謀)한 용략(勇略)과 제승(制勝出奇/상대방이 생각하지 못한 특출한 전략)으로 명병(明兵) 130,000명을 격파(破)하였고, 최고납후(摧枯拉朽/마른 나무 꺾기와 썩은 나무 부러뜨리기)와 같았다. 지고(指顧/신속하게 지시함)하고 정(定)하니 이로 인(因)하여 혼(昏/어두움)한 야중(夜中)에 아군(我軍)의 오상(誤傷/잘못하여 다침)한 자(者)가 8인과 시졸(廝卒/쿠투러) 2인에 지(止)하였다. 나머지는 좌뉵(挫衄/부러지고 코피남)한 자(者)가 없었다. 그 송산(松山)에서 아군(我軍)의 포위(圍)를 피(被)한 자(者)는, 총독(總督) 홍승주(洪承疇), 순무(巡撫) 구민앙(邱民仰), 병도(兵道) 장두(張斗), 요공(姚恭), 왕지정(王之禎), 통판(通判) 원국동(袁國棟), 주정사(朱廷榭), 동지(同知) 장위민(張為民), 엄계현(嚴繼賢), 총병(總兵) 왕정신(王廷臣), 변교(曹變蛟)와 더불어 조대수(祖大樂) 등(等)이었고, 사졸(士卒)은 10,000여 명에 불과(不過)하였다. 성내(城內)의 양식(糧)이 또한 절(絕)하자 세(勢)가 궁축(窮蹙/곤궁이 극에 달함)이 익(益)하였다. 아군(我軍)이 다시 외호(外壕)를 굴(掘/팜)하고 곤지(困之/지치게 함)하였는데, 총병(總兵) 오삼계(吳三桂), 왕박(王樸), 백광은(白廣恩), 마과(馬科), 이보명(李輔明), 당통(唐通), 낭중(郎中) 장약기(張若麒) 등(等)이 각로(各路)로 궤찬(潰竄/흩어져 달아남)하였고, 그 여(餘) 역시(亦) 하루 이틀 사이에 잠둔(潜遁/몰래 달아남)하였고, 완성(成)되기 전에 마침내 탈출한 자들이었다. 이에 다시 칙유(敕諭)를 찬(撰)하여 필첩식(筆帖式) 사포해(查布海)와 혼달(渾達) 등(等)을 견(遣)하여 성경(盛京)에 이르게 하여 첩음(捷音)을 선포(宣布)하게 하였다. ○1641년 8월 29일에 도로이 버이러 도도 등이 영으로 돌아왔다. 또 명을 내려 내대신 초품공 탑섬과 이이등은 8기의 바야라 잘안 장긴 각 1인과 매 니루의 정병 50명을 인솔하여 고교로 가서 매복을 설치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영을 나오자 명군 보병 1,000명과 조우하였는데 행산으로부터 무너져 달아나니 아군 전봉(갑시햔 초오하)의 군사로 추격하게 하였다. 탑첨과 이이등 등이 다시 군을 인솔하여 함께 추격하여 모두 참하였다. 마침내 고교에 이르러 매복을 설치하였고 명군 기병 8,000명과 보병 600명을 조우하였는데 행산으로부터 도주하여 달아나니 탑첨과 이이등 등이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역에서 참살한 적의 무리를 헤아리니 53,783명이었고, 획득한 말은 7,444필, 낙타는 66필, 갑주는 9,346벌이었다. 명군이 행산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다다라 죽은 자가 심히 많았고 버리고 간 마필과 갑주의 수는 10,000을 헤아렸다. 바다에 뜬 시체가 넓게 떠다녔는데 그 많은 것이 기러기와 집오리 떼 같았다. 상의 신모한 용략과 특출난 전략으로 명군 130,000명을 격파하기가 마르고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았다. 신속하게 정하고 지시하니 이로 인하여 어두운 밤중에 아군이 잘못하여 다친 자가 병사 8명과 쿠투러 2명에 그쳤다. 나머지는 부러지고 코피 난 자도 없었다. 그 송산에서 아군의 포위를 당한 자는 총독 홍승주, 순무 구민앙, 병도 장두, 요공, 왕지정, 통판 원국동, 주정사, 동지 장위민, 엄계현, 총병 왕정신, 조변교와 더불어 조대수 등이었고 사졸은 10,0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성내의 양식이 또한 떨어지자 세가 곤궁함이 극에 달했다. 아군이 다시 밖의 해자를 파고 지치게 하였는데 총병 오삼계, 왕박, 백광은, 마과, 이보명, 당통, 낭중 장약기 등이 여러 길로 흩어져 달아났고 그 나머지 역시 하루 이틀 사이에 몰래 달아났으니 완성되기 전에 마침내 탈출한 자들이었다. 이에 다시 칙서를 써서 빝허시 사포해와 혼달 등을 보내 성경(심양)에 이르게 하여 승전보를 선포하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